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말리 제국 (문단 편집) ==== 쇠락의 연속 ==== 마간 케이타 1세의 마지막 아들이었던 마간 케이타 2세가 1387년에 즉위하여 2년도 채 가지 못해 암살당한 이후, 말리 제국은 기나긴 쇠락기에 빠져들고야 말았다. 이 시기의 말리 제국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가장 적은 편이고, 당대 말리를 다스린 황제들의 계보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을 정도로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확실한 것은 그 전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만사 무사]] 시기의 막대한 부와 광대한 영토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말리 제국이 이 시기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망해갔다는 것이다. 말리 제국은 지중해권과 아랍권으로 통하는 북부와 동부의 영토들을 대거 빼앗기면서 이들로 통하는 교역로를 잃어버렸다. 막대한 부를 창출해내던 지중해로의 교역로가 사라지자 말리 제국은 어쩔 수 없이 그나마 보전하고 있었던 남서부 지역의 해안 항구들을 통한 해상 교역에 더 힘을 쏟게 되었다. 마간 케이타 2세를 쫒아내고 황위를 차지한 산다키 케이타는 노예 출신 만사 사쿠라 이래 처음으로 케이타 왕가 출신이 아닌 황제였다. 그러나 1년도 못가서 만사 가오 케이타의 후손인 마흐무드 케이타가 그를 쫒아내고 1390년 '마간 케이타 3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했다. 그의 재위기 동안 [[모시족]]이 세운 [[모시 왕국]]의 봉가 왕이 말리 제국을 침공해 들어와 말리 북부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봉가 왕은 점령이 아닌 약탈의 목적으로 말리를 침략한 것이었기에 그다지 오랫동안 말리에 머물지는 않았지만, 짧게 머무른 것도 아니었기에 심지어 마간 케이타 3세가 사망할 때까지도 여전히 말리 내부에서 날뛰며 쇠퇴해가는 말리 제국 전역을 짓밟고 다녔다. 비록 말리 제국이 끊임없이 쇠퇴해가고는 있었으나, 15세기 초까지만 해도 아직 외곽 지역들을 정복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인근 소왕국들을 병합할 정도의 힘은 남아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말리 제국이 새롭게 개척한 영토들 중 하나 중 디오마 지방이 있었다. 디오마 지방은 전통적인 말리 제국의 중심부였던 니아니 남부에 있는 지방으로, 원래 [[풀라족]]이 터를 잡고 살아가던 지방이었다. 그러나 니아니의 귀족 가문 출신 형제가 군대를 이끌고 풀라족을 쫒아내고 새로운 세력을 일구어냈다. 형제는 디오마 지방을 기반으로 점점 세력을 키워나갔고, 결국 이 형제들 중 형이 무사 케이타 3세로 즉위했다. 무사 케이타 3세 시기 이래 말리 제국의 영토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무사 케이타 3세 재위기의 말리 제국은 [[팀북투]]를 포함한 광대한 영토에 대한 통치권을 투아레그족에게 잃어버렸고, 얼마가지 않은 3년 후 핵심 대도시였던 우아라타마저 투아레그에게 빼앗겼다. 무사 케이타 3세 사후 그의 동생인 울리 케이타 2세가 왕위에 올랐다. 울리 케이타 2세 시기 말리 제국은 인근 아프리카 토착 부족들 뿐만 아니라 또다른 외세의 위협에 직면했다. 1450년대부터 [[포르투갈]]의 노예상들이 말리 제국의 해안가를 휘젓고 다니며 흑인 노예들을 잡아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시 포르투갈인들은 [[감비아]]의 해안가에서 주로 흑인 노예들을 잡아갔는데, 감비아 지역은 아직까지 말리 제국이 확고히 주름잡고 있던 지역이었던 탓에 포르투갈인들과 말리 제국은 이 일로 엄청나게 충돌했다. 그러다 1450년대에 포르투갈과 말리 제국 간에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수립되면서 양국 간의 노예 갈등은 일시적으로 잦아들게 된다. 말리 제국은 포르투갈 노예상들에게 자국 국민들 대신 타 부족들에게서 잡아온 포로들을 노예로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포르투갈인들은 말리 제국을 당시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강대국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그랬다. 그러나 말리 제국의 국력은 이전에 비해서는 초라할 정도로 크게 줄어든 실정이었다. 새롭게 발흥한 [[송가이 제국]]이 제국의 북부와 북동부 영역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으며, 1468년에는 송가이 제국의 창업군주인 알리 베르가 투아레그족들로부터 [[팀북투]]를 빼앗으면서 날로 힘을 키웠다. 1477년에는 마간 케이타 3세 시절 말리 제국을 침공했던 [[모시 왕국]]이 또다시 말리를 침공했다. 단순한 약탈이 목적이었던 저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본격적인 정복과 개척이 주목적이었고, 모시 왕국은 옛 [[가나 제국]]의 수도였던 [[와가두]] 등을 말리 제국으로부터 빼앗아 아예 자기 땅으로 삼았다. 1481년, 무너져가던 말리 제국에 마흐무드 케이타 2세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다. 그의 재위기에 말리 제국은 더욱 급속도로 추락하며 더 많은 영토들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인근 포르투갈 노예상들과의 접촉은 더욱 잦아졌는데, 지중해권과 통하는 교역로는 진작에 모두 잃어버렸기에 말리 제국의 경제는 이들을 통한 [[노예무역]]에 점점 종속되어갔다. 포르투갈과 말리 제국은 서로 간에 사절과 대사들을 교환하면서 본격적인 외교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날로 뻗어가던 포르투갈과는 달리 말리 제국은 갈수록 땅덩어리가 줄어들고 국력은 약해져만 갔다. 1493년에는 [[송가이 제국]]이 인근의 소금 광산을 빼앗으면서 소금을 주요 경제 공급원으로 삼던 말리 제국에 치명타를 입혔다. 마흐무드 케이타 2세는 포르투갈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자칫하면 먼 대륙의 소모적인 갈등에 휘말릴 것을 우려했던 포르투갈 왕실은 그저 관망하기로 결정하면서 말리 제국의 쇠퇴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말리 제국의 전통적인 정치적 중심지는 개국군주 순디아타 케이타의 고향인 니아니였다. 그러나 말리 제국이 쇠퇴하면서 결국 니아니마저도 적들의 손에 넘어갔다. 마지막으로 니아니의 통제권을 쥐고 있던 황제는 마흐무드 케이타 3세였다. 1496년 경 즉위한 마흐무드 케이타 3세 시기의 말리 제국은 이미 송가이 제국보다도 약해진 상황이었다. 송가이 제국의 아스키아 무함마드 1세가 이끄는 송가이 군대가 1502년 말리 제국군을 격파했고, 풀로족들이 세운 풀로 왕국은 그나마 남아있던 말리 제국의 영토들을 끝없이 갉아먹었다. 송가이 제국은 타케다의 암염 광산을 빼앗았고, 마흐무드 케이타 3세는 필사적으로 포르투갈에 군사적 원병과 도움을 요청했으나 포르투갈은 경제적 이권만 받아먹고 생색만 낸 채로 정작 구원병은 전혀 보내주지 않았다. 마흐무드 케이타 3세는 60여 년에 가까운 오랜 세월 동안 재위했지만, 그 기나긴 기간 동안 자신의 제국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꼴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거의 [[조선]]의 [[고종(조선)|고종]]과도 비슷한 포지션의 황제였던 셈. 1545년에는 수도였던 니아니가 송가이 제국에게 털렸고 궁궐은 약탈당했다. 마흐무드 케이타 3세는 일시적으로 산맥으로 후퇴했다가 니아니를 수복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미 철저하게 파괴된 니아니를 버리고 캉가바로 천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